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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 읽고 있는 책입니다.

경제학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면서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y Theory)'라니, 덜컥 이런 무서운 제목의 책을 집어들게 된 이유는 평소에 기본소득제에 대해 관심이 좀 있었고, 코로나 이후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쟁을 보고 있자니 뭔가 저도 제 주장(바램)에 과학적인 근거가 좀 있었으면 하는 심산이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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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예상대로 경제학 일자무식인 제게 만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저자가 미국인이라 미국의 연준과 재무부, 그리고 은행들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설명을 해주는데 그 셋이 당췌 어떻게 돈을 주고 받는다는 건지, 지출을 하면 누구한테는 자산이 되고 누구한테는 부채가 되고 레버리지를 어떻게 한다는 건지... 경제나 회계용어를 좀 알면 술술 읽혔을텐데, 눈이 팽팽돌아가며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좀 있었어요.

사람들이 화폐를 받아들이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 자체는 상당히 명쾌합니다. 기존에 이해는 잘 안되지만 경제학자들이 그렇다니 그런가보지 뭐,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던 생각들이 사실은 그냥 신화일뿐이다,라는 부분에서는 살짝 속시원한 느낌도 있었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던 대표적인 지점은 화폐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 화폐를 받아들일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도 받아들인다'라는 설명 이상의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이게 참... 뭔가 순환논리 같기도 하고 껄쩍지근했지만 '에이 뭐. 학자들이 그렇다니 맞는 말이려니...'하고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요.

이 책에서 설명하는 이유는 아주 명쾌합니다.
다름아닌 '조세' 때문인데요. 공권력을 가진 정부가 특정 화폐를 이용해 세금을 거둬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특정 화폐를 필요로 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 돈으로 세금을 내야하니까 나는 그 돈이 필요하다. 세금을 안내도 되는 소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금이 낼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결국엔 모두가 그 화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때요? 명쾌하지 않나요?  

정부의 곳간은 마르는 법이 없다

여기서부터 출발해보자면, '정부가 지출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조세수입이 필요하다'라는 주장도 사실은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순서가 잘못됐다는거죠. 사람들이 세금을 내서 그 돈으로 정부가 지출을 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먼저 화폐를 발행하고 지출을 해야 사람들이 그 돈을 가지고 세금을 낼 수 있으니까요. 언뜻 보면 뭔가 엎어치나 메치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소리 같기도 합니다만... 이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이 책의 핵심 주장이기도 합니다.

소위 주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수가 먼저 확보되어야 정부가 지출을 할 수 있으니 정부는 방만한 지출을 해선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밖에 없고 인플레이션까지 야기할 수 있으니 정부는 균형재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주장은 그저 신화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자국 통화를 발행하는 정부의 경우, 정부는 그 어느 때고 항상 지출의 여력이 있습니다. 세수가 완전히 바닥난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냐면, 정부의 지출이라는 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그냥 컴퓨터에 필요한 액수를 써넣고 엔터키만 한 번 치면 끝나는 간단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항상 자국통화의 발행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이나 가계처럼 돈이 들어와야 지출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그 어느 때고, 말 그대로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정부가 이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항상 지출할 여력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방만하게 지출을 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주류의 우려처럼 정부가 무작정 돈을 마구 찍어낸다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될테니까요. 그렇다면 결국 주류가 말하는대로 정부가 균형재정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 결론은 같은 게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적자재정에 대한 공포는 신화일뿐

균형재정론에 따르면, 정부는 항상 세수에 의해 지출 여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실업자가 늘어나는 불경기 때에는 세수마저 줄어들기 때문에 경기부양을 위한 지출을 위해서는 어디선가 돈을 꾸어와야 하고, 이러다보면 정부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지불불능의 사태에 빠질 수 있으니 정부는 국민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긴축재정을 통해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죠. 

그러나 이 책의 주장(MMT)에 따르면, 정부는 자국통화라면 항상 지출여력이 있기 때문에 불황기에는 적극적으로 적자재정을 펴서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진 좋죠. 그런데, 그러다가 인플레이션이라도 오면? 정부는 화폐발행권 외에 이에 대한 여러 통제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채권발행을 통해 시중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거둬들인다든지, 세금을 더 걷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죠. 정부는 경기침체기에는 적극적인 지출을 통해 완전고용을 위해 노력하고, 활황기에는 긴축재정을 펴서 시중의 돈을 거둬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경기순환과 반대방향의 지출을 통해 정부는 경제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세수가 많든 적든 말이죠.

말은 참 심플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걸 왜 못하고 있을까요? 일자리 감소로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라 빚이 느는 게 두려워서, 국가 재정이 파탄날까봐 벌벌 떠는 정부와 의회는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저자는 경제사적 고찰을 통해 그런 두려움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방만한 지출이야 당연히 문제가 되겠죠. 그래서 정부와 의회는 스스로에게 규율을 강제하게 되었습니다. 예산안을 짠다든지, 세수 대비 지출 상한선(?)을 정한다든지 해서요. 하지만 이건 스스로 정한 규율에 불과합니다. 예산안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가능하고 지출 상한선 역시 절체절명의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재난시기에는 이런 규칙에 얽매일 상황이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능력이 있는데도 문밖에 울타리가 쳐 있으니 나갈 수 없다며 자식을 굶기겠습니까? 그러나 현대에 넘어오면서 이게 마치 국가파산을 방지하기 위한 마지노선처럼 인식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상황이 되었다는 거죠.

이렇게 스스로가 만든 덫에 걸려 발생한 것이 지난 2008년 그리스발 경제위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경제위기 전 그리스나 이태리, 스페인 등의 국가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절대 부채비율이 높은 나라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들보다 국가가 훨씬 더 많은 부채를 안고 있다네요. 그런데도 유독 이들 국가가 금융위기에 취약했던 주요 이유는 정부가 자국통화를 발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 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EU 국가들은 자국 통화를 발행하지 않고 EU 공통의 유로화를 사용합니다. 유로화는 유럽중앙은행이 발행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침체기에 국가가 자국통화를 발행해서 적극적 지출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유럽중앙은행에서는 지출을 꽁꽁 묶어놓고 긴축재정을 강요했으니, 노동자들은 더욱 해고로 내몰리고, 나라 살림은 빚에 의존하고, 신용도는 하락하고, 국채 이자율은 올라가고, 늘어난 이자를 내느라 더 빚을 내고.... 이런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게다가 국가는 이렇게 손발이 묶인 반면, 민간은행들은 국가 단위를 넘어 전 유럽으로 시장이 확대되었으니 방만한 투자와 대출은 개별 국가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뛰어 넘어버렸고, 한 국가의 금융에서 버블이 터지면 다른 국가로 확산되기도 더 없이 쉬운 조건이 되어 버렸구요. 

세금의 진짜 목적

한가지 더. 그렇다면 세금은 왜 걷죠? 국가는 세수가 바닥 나도 얼마든지 돈을 찍어낼 수 있다면서요? 아 물론, 그렇다고 세금도 안걷고 마냥 돈을 찍어내다가는 인플레가 발생할테니 걷긴 걷어야겠지만... 세금의 목적은 단지 이것만은 아닙니다. 저자는 세금에 일종의 조정자적 역할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쁜 행위'는 세금을 더 걷어서 못하게 하고, '좋은 행위'는 세금을 감면해서 장려하는 역할 말입니다.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기업에 환경세를 물린다든지, 장애인을 고용하는 기업에게는 세금을 깎아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 예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국가가 세금을 걷는 이유는 그 세금이 없으면 지출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수가 없어도 돈이야 찍어내면 그만이니까요. 그보다는 경제 사이클에 맞춰 과열과 침체를 조절하고, 바람직한 경제행위를 장려하고 그렇지 않은 건 자제시키려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강하달까요.

이 대목에서 흥미로웠던 건 법인세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었습니다. 전 돈 많이 버는 기업은 세금 좀 많이 내서 나라 살림에 기여하는 게 좋은 거 아닌가,라고 쉽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세수가 국가재정의 근본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편견일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위에서 말한 조세의 조정자적 역할에 비추어 본다면, 기업활동이라는 바람직한 경제활동에 세금을 올리자는 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잘못된 방향일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걸 보면 적극적인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현대화폐이론이 비단 진보진영의 입장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진 않습니다. 법인세 감면은 오히려 보수 쪽의 주장이니까요. 저자 스스로도 현대화폐이론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저 현상의 기술일뿐이다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단지, 무엇이 바람직한 경제활동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가 개입될 여지는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고정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토론하고 합의해나가야할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학이 정치학이나 사회학의 어떤 지점과도 맞닿아 있는 일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부가 100% 고용을 책임지게 하자

이렇게 현상의 기술과 정책적 제안의 경계에서 이 책의 결론에 이르면 정책적 제안의 방향으로 한 발 훅 내딛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정부가 '일자리보장/최종고용자'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주장인데요.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 비자발적 실업자를 100% 고용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프로그램이 일종의 균형추로서 경제를 상당히 안정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일종의 최저임금 지지선 역할을 하기도 하고, 호황기에는 민간에서 노동력을 많이 흡수해갈테니 자연스레 정부지출을 줄일 수 있고, 불황기에는 민간에서 탈락된 노동력을 흡수하며 정부지출을 늘려 경기부양 효과도 거둘 수 있구요. 물론, 수요증대로 수입이 증가하고 환율에 압력을 주고 물가가 상승하다보면 인플레가 올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나, 주권통화와 변동환율제를 유지하고 있는 정부에서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짓은 하지 말자는 겁니다. 실보다 득이 훨씬 큰 일인 거죠. 
게다가, '경제안정'과 인플레 방지를 위해 점점 늘어만 가는 실업자들의 고통을 도구로 사용하자는 건, 윤리적으로도 못할짓이 아니냐고 단언합니다. 속 시원합디다. 이런 말, 누가 좀 많이 좀 해줬으면 했어요. 
(사실, 인플레에 대한 우려는 이렇게 몇마디로 끝낼 주제가 아니긴 하죠. 이 책에서도 상당한 부분을 할애해 이를 다룹니다. 짐바브웨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케이스도 분석하구요. 자세한 건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나저나, 그 많은 실업자들을 다 고용하려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냐구요? 걱정 마세요. 정부는 그 어느 때고 자국통화의 지출여력이 있습니다. 엔터키만 치면 되니까요.

결- 우리 모두가 우리 스스로를 돌보는 사회를 위하여

책을 읽다보니, 제 관심의 출발점이었던 기본소득과 재난지원금 같은 정책에 대해서는 저자가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균형재정론은 틀렸고 정부는 늘 지출여력이 있으니 기본소득도 주고, 재난지원금도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그런 식의 '유수정책'은 언제나 기득권의 부를 늘려주는 쪽으로 귀결이 되곤 했답니다. 유수정책이라니... 낙수효과랑 비슷한건가? --;;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요사이, 시중에 풀린 자금들이 아파트 가격만 끝간데 없이 밀어올리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기도 하구요. 이 부분은 더 공부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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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주제에 대해 이해가 깊지 못하면 말이 길어지기 마련인데, 그래서 그런가, 간만에 너무 긴 글이 되어 버렸네요.
저는 그냥 읽은바를 정리도 하고싶고, 간만에 받은 신선한 자극을 같이 나누고도 싶고 해서 쓴 글이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책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세수가 바닥나면 국가는 파산의 위기에 몰린다는 위협, 일정 정도의 실업과 경기침체는 경제안정을 위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뉴노멀'이라는 비정한 선언... 이런 것들이 저자의 주장대로 그저 신화일 뿐인지, 아니면 다수 경제학자들의 말대로 만고의 진리인지 저로서는 판별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적어도 그런 말들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계기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변화는 그런 의심들에서 생기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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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부분, 경제학 책을 읽으면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놀라운 두 문단을 옮겨 적고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우리는 화폐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해 줄 새로운 이야기 프레임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확산시켜야만 한다. 
이 새로운 이야기 프레임은 시장, 자유 교환, 개인의 선택 같은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라는 메타포와 공공의 이익 같은 개념들을 필요로 하며, 그런 것들로 개개인들의 사적 이익의 계산을 대체해야만 한다. 우리는 정부가 수행하는 적극적 긍정적 역할에 초점을 두어야 하며, 거기에 쓰이는 돈은 우리 모두를 윤택하게 한다는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마땅히 보장받을 권리는 얻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세금을 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로 엮여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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