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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통일전망대

걷자웃자 2003. 7. 27. 22:12

마지막날(2003.07.27.일)



음... 사실 뭐라 끝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 날의 일기를 적고 끝내면 되겠지만...


음...


이날은...
한달 동안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제게 상을 주고 싶어서
바다가 보이는 모텔을 잡고 닭고기에 샐러드에 맥주에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와
먹다지쳐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

뭔가 비장하고 의미심장한 마무리를 바라셨던 수많은(!) 애독자 여러분께
실망을 안겨드리기 싫어서 억지로 뭐라도 지어서 마무리를 하려 했으나
이미 끝난지 한달 반이나 다 되가는 여행의 느낌과 생각을 글로 되살려 뻥을 친다는게
쉽지만은 않더군요.


뭐 그래도 마지막날은 통일전망대가서 모 했나 궁금해 하실 분들이 혹시 계실지도 모르니 간단히 적어보면,
아침에 라면끓여먹고 - 이 라면은 성수기라 8만원이나 하는 숙소를 무려 5만원이나 깎아 3만원에 해주신 '펜션형 민박'집 아저씨께서 불쌍해 보인다고 하사해 주신 것입니다. ^^;; - 동해안을 따라 쭉 걸었습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그리고, '통일'전망대에 간다 생각하니 참 비장해 지더군요.


아참, 중간에 어디더라... 무슨 포 였는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화진포였나?). 암튼,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별장'이 있는 동네가 있더군요. 제가 가던 국도에서는 한 1km 정도 빠져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이곳 지형을 모르시는 분께서는 좀 의아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강원도 쪽의 지금의 휴전선은 38선 이북으로 한참 올라가 있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 주석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후에 휴전선이 확정되고 나서 이승만이 별장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같았으면 구경삼아 들렀다 왔겠지만, 통일전망대에는 늦게 가면 못들어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지나쳐야 했습니다. 해방이후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의 별장이 한 동네에 있다니, 그 동네사람들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그렇다는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웬지 전 이북에서 고속도로를 놓으면 남한에도 놓고, 지하철을 놓으면 남한에도 지하철이 생기던, 유치한 체제경쟁 때문에 만들어진 웃지못할 상황은 아니었을까, 잠시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머, 진실을 아시는 분께서는 교정해 주시구요. 나중에 꼭 다시 들러서 두 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꼭 봐야겠어요.


암튼 그렇게 국도를 따라 걷다보니, 2시가 좀 넘어 마차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통일전망대까지는 도보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자기 차가 있으면 차에다 출입허가증을 받아 붙여 몰고 들어가면 되지만, 저같은 뚜벅이들은 몇십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도보'여행의 마지막이었던 셈이지요.
입장료와 버스비를 내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쪽을 바라보니 흐린 날씨 때문에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길게 뻗어있는 길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더군요. 제가 한달여 동안 씩씩거리며 걸어왔던 그 길들 말입니다. 여행동안 지도를 많이 봐서 그런지 방송에서 무슨 시뮬레이션 해주는 것 마냥 한반도 남쪽 땅의 길들이 머리 속으로 죽 펼쳐지는게, '아, 인제 나도 3차원적 사고가 되나부다' 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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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다리쉼 - 마차진에서 통일전망대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암튼, 도착한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에 들어갔습니다. 전시관에는 별로 볼 거 없습니다. 615공동선언 이후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이북에 대한 편견과 증오로 가득한 자료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띄어 사람 기분을 좀 언짢게 만듭니다. 아... 그런 자료말고 재밌는 것도 몇 개 있었는데, 사진 두 개만 올려 놓고 지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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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장]
학교 다닐 때 저도 서명 몇 번 받으러 다닌 적 있습니다만, 이런 걸 받아본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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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 하시던 분들이 나무에 새겨놓은 글씨래요]


전시관을 돌아 나오니, 바로 북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사실 전 여기가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상 외로 해금강과 금강산이 너무 가까이에 있더라구요. 한달 동안 걸었던 경험에 비추어, 한나절만 걸으면 바로 금강산이겠더라구요.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다니...' 이 가까운 곳에 가는 것도 퍼주기니 뭐니 지지고 볶고 그렇게 말들이 많았나 생각하니 가슴이 참 먹먹해 지더라구요.
제가 몸담고 있는 615산악회에서 내년에 육로 금강산 관광을 가자는 결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랑 그 얘기할 때, 버스타고 휴전선 넘어 금강산에 가면 너무 감격적일거 같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눈으로 보니, 허무할 거 같습니다. 고작 요거 넘어 오자고 그 세월이 흘렀나, 답답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백두산까지 도보여행이 허락되는 그 날이 와서 직접 내발로 한번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지 않고서야, 이 허무하고 답답한 심정은 달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디, 좋지도 않은 몸 기력 다 쇠하기 전에 어서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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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해금강]
사진 중앙쯤, 구름 밑으로 보이는 바위산이 해금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디지털 줌을 쓰지 않고 광학 줌으로 3배만 땡겨서 찍은 것인데 이렇게 가까이 보인다.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


그렇게 북녘 땅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뒤돌아 나오는데, 한 떼의 대학생들이 보입디다.
휴전선 횡단팀이라는데, 젊고 신선한 기분이라기 보다는 좀 짜증이 나더군요. 왜냐구요?
전 못 걷게 되있어서 버스타고 들어왔는데, 갈 때보니깐 걔네들은 차량 호위까지 받아가면서 걸어가고 있더라구요. 배낭도 한 명도 안지고 있는 걸 보니, 배낭은 호위차량이 다 실어다 주나 봅디다. 참 내.
웬 놀부심보냐구요? 머 그렇게 볼 일만도 아닙니다. 물론 전 그날 저녁이 되서야 알았지만 제가 통일전망대에서 여행 마친게 7월 27일, 그러니까 정전 50주년 기념일이었더군요. 그래서 그 일군의 대학생들이 거기서 휴전선 횡단을 시작한 거였더군요. 아, 그러면, 그런 뜻깊은 날에 군의 호위까지 받으면서 여정을 떠나는 거면 적어도 통일전망대 온 사람들한테, 오늘이 정전협정 조인이 50년이나 된 날인데, 아직 한반도는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고, 한반도에 피붙이 하나 없는 부시 놈이 으르렁 대는 통에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웃기는 상황이니 빨리 통일을 하자는 둥 머... 그런... 유익한 얘기 몇 마디는 좀 들려주고 길을 나서도 나서야 되는게 아니냐구요. 안그려요?(엇... 갑자기 마축지 말투가... ^^;;)
근데 걔네가 길떠나기 전 모여서 외친다는 소리가 고작...
"화이팅!"
이더라구요. 뭐하자는건지. 쩝.


아, 또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제 뒤틀어진 성격이 나오네요.
여튼 그렇게 한달간의 도보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짜증 속에 마치고 오는 길에 보아두었던 바닷가 모텔에 짐을 풀고 혼자 성대한 뒷풀이를 한 거였답니다.


간단하게 쓰겠다고 시작했는데, 엄청 길게 썼네요. 쓰다보니 또 기억이 새록새록 나서... ^^;;
여기까집니다.




<진짜 結>


한 달간의 도보여행기... 별 거 없이 그냥 일기를 옮겨놓다보니 좀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다 해놓고 보니, 좀 재밌게 쓸 것 같다는 후회가 드네요.
담에 백두산까지 가는 여행 후기는 엄청 재밌게 쓰겠습니다. 기대하시구요.


음.....


도보여행 전후로 해서, 많은 분들이 묻더군요.
"왜 그랬어?"
사실 저도 잘 모르고 그냥 함 해보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답을 못드렸었는데,
이참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는 것으로 결말을 대신해야겠습니다.


1) 회사 관두고 할 일이 넘 없었다.
2) 살을 빼고 싶었다. 한비야 왈, 걸어서 뺀 살은 예쁘게 잘 빠진다더라.
3) 앞으로 회사를 다니든 뭘 하게 되든, 늘, 여행가고 싶어 안달일텐데, 이참에 아주 지겹게 여행을 다녀보고 싶었다.
4) 친척들이 있는 호주에 가서 지평선이 보이는 도로를 달려보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5) 내 의지력과 체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6) 서울에서의 소심한 고민과 번민에서 좀 떨어져 크게 보고 싶었다.
7) 내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땅에서, 어떤 사람들과 살고 있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8) 멋져 보이지 않는가.


위의 목적에 비추어 여행 한 달을 되돌아보니,


1) 시간은 참 잘 때웠다...... 100점
2) 살은 한 5kg 빠졌다. 하지만 예쁘진 않다..... 70점
3) 음... 지겹게 여행은 다녔지만, 앞으로 또 여행가고 싶은 맘이 안생길 것 같진 않다.
외려, 보고 겪었던 풍경과 사람들 때문에 더 가고 싶을 것 같다...... -30점
4) 호주가는 것 만큼은 안썼지만, 돈, 꽤 많이 썼다. 디카사랴 등산화사랴 중간중간 몸보신하랴....... 50점
5) 의지력과 체력은 확인을 못해봤다. 사실... 예상만큼 힘들지 않았다. 널널하게 걸어도 한달이면
광주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그래도 초반엔 좀 힘들었으니까...... 40점
6) 좀 떨어져 크게 보니...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라. 겁**리가 조금씩 상실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30 평생을 가지고 살았던 소심증에서 벗어났다면 거짓말이다. 선택의 순간 앞에서, 늘 초조하다...... 60점
7) 생김생김과 맘씀씀이를 눈과 맘에 많이 담아왔다. 좋다. 허나, 아직 안가본 곳이 더 많다..... 60점
8) 멋져 보이긴 한 것 같다. 하나도 안 멋졌지만... ㅋㅋ ..... 90점


^^;;


여행 동안, 궂은 날엔 비맞을까, 맑은 날엔 더위먹을까 걱정해서 전화주신 분들,
몸 보신 시켜주신 분들,
큰 산 넘을 때 함께 하려고 멀리까지 찾아와 주셨던 분들 - 물론 심심해서 놀러오신 거였겠지만 -,
그 맘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함께 길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설레였던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 평균 55점짜리 저조한 성적의 여행이었지만...
그래서 이 여행때문에 제가 얼마나 달라지고 변했는지 뾰족이 뭐하나 내놓을게 없지만,
나도 그 사람들에게 함께 길가는 사람이려고 노력하다보면,
이 여행 때문에 참 많이 달라지고 좋아졌다고
나중에 삶으로 보여드릴 게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실망하지 마시고 끝까지 지켜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백두산갈 때는 좀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면 합니다.
그 때까지 체력보존 잘들 하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 날, 서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제가 수첩에 아래와 같은 멋진 말을 적었었네요.


"나는 지금 더 긴 여행의 출발을 기다린다"



여기까집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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