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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째날(2003.07.23.수)
(이날은 며칠 후에 정리한 일기를 편집하여 올립니다)
어제, 기종이와 수미누나가 왔다. 막차를 타고 밤 10시쯤 도착한 그들은, 장을 두보따리나 봐가지고 왔다. 오늘, 내일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어차피 설악산행은 불가능할 것 같아서 먹을거나 많이 사오라고 메세지를 날렸더니 수미누나 그렇게 왕창 사왔다. 덕분에 어제밤엔 삼겹살과 소주, 맥주로 포식을 하고 오늘 아침엔 버섯 쇠고기 전골로 포식을 했으며, 남은 밥과 참치로는 주먹밥까지 만들어 등산길에서 먹었으니 정말 잘 먹었다. ^^;;
[전쟁과도 같았던 아점식사의 잔해들]
계속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간간이 해도 비칠 정도로 날씨가 개여가고 있었다. 부랴부랴 준비해 1시반경부터 오색약수를 출발해 저녁 6시반 경 대청봉에 올랐다. 오르는 길, 지난 월악산때보다 훨씬 심한 경사가 계속 이어지는 무지 힘든 길이었다(오색 매표소부터 대청봉까지가 약 4.8km). 예상보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온 수미누나가 걱정이 많이 됐다. 중간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역시 산악지형인지라 시도 때도 없이 비가 흩날리기 시작하고... 등산로엔 안개가 잔뜩 껴서 아래위로 도무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도 없고... 언제나 산을 오르는 것은 정말 두려우리만치 힘든 일이다. 결국 중간부터는 기종이와 내가 수미누나의 배낭을 대신 져가며 산을 올랐다. 자신도 힘들었을텐데 선뜻 배낭을 대신 지겠다고 자청한 기종이가 넘 위대해 보였다. 인간이란 존재의 미덕을 보여주는 훌륭한 놈이다.
[앞뒤로 짐을 맨 씩씩한 기종이]
["와! 난 짐없다!" 설악폭포에서 수미누나]
암튼 그렇게 고생고생... 산을 오르는데, 대청봉을 1km 채 안남겨놓은 지점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며 해가 나기 시작했다. 몸은 여전히 힘들었어도, 해가 날 때의 그 심정이란... 세상 모든 희망이 우리를 향해 미소짓는 것 같은... 그런 감동... 바로 그것이었다.
일기에 쓴 적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번 도보여행은, 날씨가 날 너무 많이 도와주었다. 장마라 걱정했으나 큰 비는 내가 다니는 지방을 피해서 내려주었고, 해 때문에 뜨거웠던 날은 채 3일이 안되며, 쉬어야 겠다 생각한 날쯤 비가 내려 주었으며, 설악산에선 일기예보를 뒤엎고 날씨가 개여 등산을 시작했을뿐 아니라 다시 비가 흩날리던 변덕스런 기상이 정상근처에서 말끔히 개여, 드라마틱한 장관을 연출해 주었다.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그냥 우연일뿐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땅과 하늘은 제발로 국토종단을 하고 있는 날 지켜봐 주고 배려해 주었던 거다. 고맙고, 고맙다.
[대청봉에서 내려다 본 하늘]
암튼 그렇게 벅찬 감동으로 도착한 대청봉엔 또 하나의 감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해... 정말 구름은 바다였다. 우리 발 아래... 일정한 높이로 깔려 있던 흰 구름의 바다... 그리고 맑게 개인 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땅의 혈맥과 맞닿은 바다...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기껏해야 몇십미터 앞만 바라보며 국도변을 따라오느라, 내가 어떤 땅을 밟고 있는지 실감을 못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우리 강산은 혈맥이 용솟음치며 들고 일어난 패기의 땅, 생명들을 따뜻이 품고 있는 너른 땅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길에서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나를 품어주는 고마운 땅, 하늘이었다. 어떤 자극에도 쉽사리 동하지 않는 내 무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준 고마운 물방울이었다. 도무지 말로는 표현이 잘안되는, 그런 장관, 그런 심경이었다.
[대청봉에선 수미누나와 이름 모를 아저씨]
대청봉.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내 땅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냥 좋은 풍경에 대한 미적 감동을 넘어서는 어떤 것. 바로 이런 감정의 축적이 아닐까. 나와, 사람들과, 땅과 하늘을 덩어리로 보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말이다. 난 아직 한참은 더 사람을 만나고, 길을 걸어야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대청봉 얘기는 백마디를 더해도 모자랄듯하니 여기까지.
[수미누나와 기종이]
[수미누나와 나]
[대청봉 표지석]
[대청봉에서 바라본 속초 앞바다]- 디지털 줌으로 찍었더니 화질이 엉망이다
대청봉에서 약 600m를 내려오면 중청대피소(산장)이다. 통나무로 지어진, 생각보다 꽤 운치있고 깔끔한 곳이었다. 취사도 가능하고 식수도 있어 미리 준비를 했더라면 더 좋을뻔 했다. 담에 사람들이랑 오게 되면, 쌀 버너 코펠 김치 같은 거 준비해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저녁이 되서 보이는 속초쪽의 야경과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도 너무 아련한 느낌을 주는 그림 엽서같은 풍경이었다.
[중청산장에서]
산장이라고 해서 무슨 군대 막사를 상상했었으나, 중청산장은 통나무로 지어진 깔끔하고 예쁜 집이었음.
사진에 다리가 넘 두드러져 올릴까 고민하다가 중청산장의 분위기를 전하고자 올림.
![사용자 삽입 이미지](http://cfs3.tistory.com/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YmxvZzQ1NDU0QGZzMy50aXN0b3J5LmNvbTovYXR0YWNoLzAvODEuanBn&filename=cfile29.uf@253A643D58801AFC0D9BF4.jpg)
[저녁]- 멀리 속초 앞바다에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보인다
스크롤의 압박으로 인해, 담날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은 담 페이지로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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