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기독교 풍자 코미디에 가까웠다. 아, 우스웠다는 얘긴 절대 아니고, 진지한 의미에서 Seriously, 그랬다는 얘기다. 오랫만에 본 괜찮은 영화였다. 정말이다. 허나,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던 영화 홍보 문구나, '상처받은 여인과 그 옆을 묵묵히 지키는 한 남자의 얘기'라는 스포성 정보들과는 정말, 너무나 거리가 먼 영화였다는 뜻이다. 차라리 '비밀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는 그나마 가까운듯. 시종일관 영화는 내면 깊숙한 곳의 분노에 어쩔 줄 몰라하는 한 여인과, 기독교 커뮤니티의 어이없는 상처 치유기를 위태위태하게 엮어간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상처와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한 분노를 직면하지 못한다. 일종의 방어 기제일 것이다. 아이의 유괴범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경찰서 밖으로 나온 그녀는 '내가 왜 그랬을까요'라며 안타까워하지만, 그녀가 그 유괴범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자신을 내맡겼었다면, 그녀의 몸은 아마 그 엄청난 에너지를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몸이 먼저 알고, 고개를 돌려 그녀는 파멸의 시간을 피해간다.
하지만, 분출되지 못한 분노는 '내가 여기 있으니 날 좀 보살펴 달라'는 신호를 보내듯 그녀의 호흡을 막고, 정상적인 인지과정을 파괴한다. 숨이 꺽꺽 막히고, 자기 주민등록번호조차 기억을 못하는 그녀에게, 기독교 커뮤니티는, 분노 표출의 합법적 공간을 제공한다. '이 곳이라면 아무리 엄청난 괴성을 지르며 울어대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한 그 묘한 공간에서, 억눌렸던 울음은 터져나오고, 막혔던 숨통이 트인다.
기독교 커뮤니티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찔끔,하고 잠시 새어나오긴 했지만, 더 이상 갈 길을 몰라 또다시 침잠하는 분노는 '주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요. 이건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라 그냥 느끼는거에요'라는 새빨간 거짓 가면 뒤에 숨겨지고, 억눌린다. 잠시 유순해진 내면은, 이제 다 끝난 거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거짓 치유와 거짓 신앙은 그녀에게 거짓 용서를 부추긴다. 다시 그 분노의 대상과 직면했을 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셔서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아 버린' 그 놈과 직면했을 때, 거짓은 그 추악한 속내를 드러내고, 그녀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내가 여기 고대로 있어요'라며 다시 시위를 시작한 셈이다. 지난 번보다 훨씬 맹렬한 기세로.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번져간다. 거짓 치유와 거짓 신앙과 거짓 용서를 강요했던 기독교 커뮤니티에, 그녀는 짱돌을 날린다. 학대하듯 관계를 맺고, 급기야는 팔목을 긋는다.
그녀가 병원에서 나오고, 우연히 들른 미장원에선 유괴범의 딸을 만나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뛰쳐나오고, 자르다 만 머리를 집 마당에서 다시 자르기 시작하고, 송광호는 거울을 들어주고, 지저분한 마당의 한 켠엔 다시 햇볕이 비추고,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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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와 김사장의 대화.
"김사장님 교회 왜 다녀요?"
"어려운 질문이네. 아 왜 다니겠습니까. 하나님 믿으려고 다니지."
"정말 하나님 믿어요?"
"네 믿어요!"
"여기 하나님이 계세요. 다 보고 있다구요. 정말 믿어요? 정말?"
"......"
폼새로 보아선 절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던 그는, '하나님이 보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즉답을 피하고 머뭇거린다. 딜레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냥 믿는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고, 안 믿는다면 있지도 않은 하나님의 눈치를 봐가며 대답을 피할 건 뭔가.
'거짓 신앙'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거짓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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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교회는, 억눌린 분노를 터뜨려줄 합법적인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나마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커뮤니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좀 솔직했었더라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에요. 당신의 분노는 당신이 직면해 싸워야 합니다. 아니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든가.'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엉덩이 툭툭 털어 보낼 수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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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급기야 팔목을 그을 때, 이미 시간이 두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걸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치유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스쳐 보기만 해도 비명이 터져나올 정도로 흉물스러운 분노와 생생히 마주하는 과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랐던 김형경의 소설에도, 말끔한 치유과정은 나오질 않았었던 것 같다. '말끔한 치유'란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일까. 지저분한 마당 한 켠을 비추는 햇볕, 이 영화의 인상깊었던 마지막 장면은 그걸 말하려 했던 것일까. 추악하고 지저분해도, 그저 말가니 지켜볼 수 밖에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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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여기서 멀리 떨어져서 봐!'라고 외치는 듯한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울어서 진이 다 빠졌다'던 친구녀석은 대체, 영화를 어느 콧구녕으로 본건지 모르겠다. 노골적인 거리두기의 그 두터운 장벽을 뚫고 달려나가 캐릭터들과 정서적 합일을 이뤄낼 정도의 분노와 상처가 그 녀석의 내면에도 꿈틀대고 있던 때문이었을까. 사람은 참, 가지각색. 사연도 많아라. 그 녀석은 이 영화를 네 번이나 봤단다. 미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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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엔, 정신적 상처를 다루고 보살피는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담기관이나 의료기관의 문제뿐 아니라,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 인식, 도움을 주고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미성숙한 인간 관계들, 종교 커뮤니티의 문제...
정신 건강도 정기 검진과 적절한 케어가 필요하다는 말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