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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오래간만에 5점 만점을 준 영화입니다. 원래 이동진이 너무 좋다는 영화는 보통 재미가 좀 없어서 이제 보지 말아야지, 하며 극장을 나서곤 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고 또 보러갔습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제목도 친숙하고, 저 포스터에 보이는 개선문과 사람들의 물결. 웬지 감동의 도가니일 것도 같잖아요?

이 사람들의 물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바로 첫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월드컵에서 프랑스를 응원하러 모인 사람들이더군요. 영화 속 형사도 얘기하는 바이지만, '국뽕' 맞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전 우리 나라만 그런 줄 알았더니, 프랑스도 대단하더군요. 월드컵 시즌마다 '대체 왜!!'라는 의문과 답답함을 가슴에 묻고 거리에, TV 앞에 모인 사람들을 몰래 흘겨보는 저로서는 저 연대와 저항의 나라라는 프랑스마저 저 지경이라니, 영화 시작부터 좀 암담한 느낌이었달까요.

그 '하나되는' 열기는 온데간데 없이, 영화는 바로 프랑스 한 빈민가로 향합니다. 경찰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얼마전까지는 마약조직의 득세로 경찰은 발도 못 붙이는 곳이었다나요. 경찰은 그 마약조직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며 득의양양하지만, 상황이 딱히 그래보이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경찰을 신뢰하지 않고 경찰과 사사건건 날을 세웁니다. 심지어는 동네 꼬마들까지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지역 보스(?)는 틈만 나면 경찰을 몰아내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뭐가 먼저인진 알 수 없지만, 경찰은 이런 주민들의 이런 반항을 제압하기 위해 더 폭력적이 되고, 이럴수록 주민들은 경찰을 더욱 불신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화는 두시간 내내 톡 하면 터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들로 가득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누가 잘못인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영화는 그저 담담히 보여줍니다. 누구하나 감정이입하기도 참 어려운 영화였어요. 그나마 그 동네에 발령을 받고 처음 배치된 주인공이 그중 가장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주인공이라기엔 너무 무기력합니다. 기껏해야 동료 경찰의 고무총탄에 맞아 다친 아이에게 약을 사주는 정도?(병원도 아니고, 약국이라니 나 원 참.) 하지만 이게 극 구성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현실이 무겁기 때문으로 느껴집니다. 사실, 이 시대 그 누구도, 이렇게 만연한 폭력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 전통적 의미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도 정직하지 못한 작법이었을 것 같아요. 그저 아프게 보여줄 뿐입니다. 손에 땀을 쥐며 2시간여 영화를 보지만, 그 긴장이 어떤 해소도 없이 체한 떡처럼 컥 하고 가슴에 무겁게 남는달까요.

이 빈민가에 만연한 폭력이 비단 그 동네의 얘기로 국한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코로나 이후 아시안들을 향한 무차별 폭행이나,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가깝게 우리 나라에서는 나날이 격해지는 정당 지지자들 간의 갈등(요새는 정책이나 이념이 아니라 진영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것 같아요), '꼴페미'와 '여혐'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갈등과 폭력이 잦아든 시대라고 했고 저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글쎄요. 요사이의 갈등과 폭력의 양상이 심히 우려스러운 건, 그저 한 소심한 인간의 기우일지.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감독이 월드컵 응원 군중으로 영화를 시작한 이유가 그 '국뽕'의 물결과 격화되는 폭력의 기저에 뭔가가 공통적인게 흐르고 있다는 통찰이라고 보는 건 과대해석일까요? 혐오와 폭력은 나와 타자의 구별, 과장되는 타자의 위협, 위기의식... 이런 것들에 기초하고 있기 마련이니, 그리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크흠.

어쨌거나 참 무거운 영화였습니다. 아직도 엔딩장면, 그 소년의 분노에 차있지만 어딘가 공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80년대의 분노는 자본가들을, 권력자들을 타도하면 손쉽게(?) 해결되는, 방향이 분명한 것이었지만, 현재의 분노는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고 그저 약자든 강자든 나 아닌 어떤 것으로든 무차별적인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무섭고 끔찍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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