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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

장평까지

걷자웃자 2003. 7. 15. 21:49

열아홉째날(2003.07.15.화)


장평이라는 곳에 왔다. 영동고속도로와 31번 국도가 만나는 곳이다. 원래 오늘은 대화까지만 걸을 예정이었는데, 얼마되지 않는 거리라 내친 김에 장평까지 왔다. 한 27-8km 정도 걸은 것 같다.
걷는 속도와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많이 늘어났다. 하다보니, 된다. 덕분에 하루정도 일정을 앞당기거나, 비오는 날 쉴 수 있는 날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버스정류장서 다리쉼을 하다가 할머니(아주머니로 보였으나 막내가 37살이고 손주가 고3이란다. 이쯤되면 할머니일 수밖에... -.-;;)와 말씀을 좀 나눴다. 가슴이 약간 답답해지는...... 그 분 왈, 옛날에는 사람이 환갑을 넘기기가 어려웠는데 요새는 먹기도 잘 먹고 의료시설도 발달이 되서 80 넘기기가 너무 쉬워졌단다. 그래서 큰 일이란다. 늙은이들이 안죽고 살아있어서 젊은이 한 명이 노인을 3명씩 부양해야 하는 때가 됐단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은 서울 아들네 갔다가 새벽부터 부엌에서 부스럭거린다고 쿠사리만 먹고 내려오셨단다. 시골 분들은 모두 3-4시만 되면 일어나시는데 서울선 일요일에 12시까지 내리자니 배가 고파 그런 건데 또 그릇 깨시려고 그러냐고 쿠사리 먹고 얼마나 서러우셨겠나.
내 부모님 생각이 문득. 난 나중에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그 할머니께서 덧붙이시는 말. 좋은 대학 나오고 더 배운 놈들이 더하다는... 그래서 공부 잘한다는 손자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는... 정말 올바로 사태를 파악하시는 분이셨다. 남산골 샌님같은 외모와 말투를 가진 날보고 일부러 하신 말씀이실지도...
반.성.하.자.


다니면서, 옛날 내가 알던 시골집들은 거의 없고 거의 모든 집들이 너무 예쁜 전원주택으로 바뀐 것을 보며, 시골도 살만해 졌구나. 나도 저런 집 시골에 하나 지어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많이 했는데, 그 할머니 왈, 저게 다 빚이란다. 농협에서 빚내서 집 짓고, 빚내서 차사고, 빚내서 경운기 사고 그런단다. 외려 옛날 집 그대로 가지고 살고 있는 집이 빚이 없는 집이란다. 그래서 요새 한 농가당 빚이 1-2억씩 안되는 집이 없단다. 지금 시골지키며 살고 있는 노인들 다 죽고나면 시골 땅들 다 농협 땅이 될 거란다. 그 말씀을 듣고 길을 가는데, 길가 배추밭이 배추를 뽑지도 않은 배추밭이 다 뒤엎어 있는게 보였다. TV에서만 보던 그런 장면이 말이다. 버스 정류장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라는 포스터가 도배되어 있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뒤엎어진 배추밭]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이런 포스터가 거의 전국 농촌을 뒤덮고 있다. 내용이... 처참하다...


지난 주말 산악회 여름 산행가서 밤에 술마시다가 농촌의 미래, 농업의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운식이는 식량주권을 지킬 수 있을 최소한의 농업만을 제외하곤 지금의 농업은 정리될 것이라 했다. 공업지대로 바뀌거나, 기업농, 특화농 등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했다. 그런데, 어찌됐건, 오늘 본 풍경들은, 농협이 소유한, 혹은 농협이 대기업에 팔아넘긴 땅에서 베트남 처녀들이 싼 값에 고용되어 중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그런 퍽퍽한 미래가 이 소담스런 농토 위에 전개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지키고 버티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모두 미래의 베트남 처녀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을텐데 말이다.


(이 글을 정리하기 몇 일 전-9월 10일-, 이경해라는 한 농민 분이 WTO 반대를 외치며 이역만리 멕시코 칸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단 소식을 들었다. 처참하고, 가슴아픈 일이다. 그 분의 명복을 빌며... 우리의 농업현실에 대해,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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